[책] 전쟁 전 한 잔 - 인간적인 사립탐정의 활약


전쟁 전 한 잔 A Drink before the War (2009, 1994)



데니스 루헤인
황금가지/조영학/P.357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변명부터 해볼란다.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 서양 장르문학에 푹 빠져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 국내 출판된 작가에 한에서 다양한 책을 봤었고, 그에 열광했었다. 내 인생의 작가 3명을 만난 것도 그 때였던가.
하지만 그 이후 서양 장르문학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몇 년간은  인문학 서적에만 빠져지내던 때도 있었고, 또 몇 년간은 라이트 노벨에 빠져있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일본 장르문학에 빠져지내고 있다. 즉, 근 10년 사이의 서양 장르문학의 흐름을 들여다 볼 기회같은 것은 없었다.
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1년도 되지 않는다. 수 년전 '미스틱 리버' 영화를 볼 때도 몰랐었고, 작년 '셔터 아일랜드' 가 개봉했을 때도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관심갖지 않았다. 작년에 이웃블로거를 통해 그의 이름을 간신히 알았을 정도였다. 남들이 그의 글에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그게 누구야?' 이러고 있던 것이 나였다.
그의 작품을 이제야 접한 사실에 대하여 후회하진 않는다. 이제라도 알게되어 안목을 넓히게 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게다가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하드보일드 장르를 접할 기회가 전무했던 나에게 이 작품은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취향에 맞냐 안맞냐의 의미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접한 경험은 좋은 양분이 될 것이었다. 누군가 할지 모를 '장르문학 좋아한다며?' 라는 질문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었다.


켄지와 제나로는 사립탐정으로 상원의원 멀컨에게 하나의 의뢰를 받는다. 청소부였던 제나의 소재를 찾는 것. 그녀가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의뢰를 받아든 켄지와 제나로는 결국 제나를 찾았으나 갱의 습격으로 제나는 숨지게되고 켄지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 제나가 죽기 직전 켄지에게 넘겨준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추악한 범죄가 드러나게 되는데......


데니스 루헤인의 데뷔작이자 스스로 대표작이라 부르는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처음 읽어나갈 때의 느낌은 이질감이었다. 공감하기 힘든 유머를 남발하는 대사와 캐릭터 때문이었다. 웃기지 않는 유머와 단정적이지 않은 캐릭터는 낯설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낯섬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낯선 것은 익숙한 것이 되었다. 유머스러운 대사는 캐릭터의 특성이 되어갔고, 단정적이지 못한 캐릭터는 입체감을 입기 시작했다. 뚜렷한 캐릭터 특성을 통해 이야기 구조의 기능적 역할을 하기보단 인간의 다양성, 즉 한 개인이 여러 특성을 지니게 함으로 현실적 입체감을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하긴 뚜렷한 특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이 소설 상으로나 가능한 것이지 현실 속의 인간을 단적으로 표현 가능하겠는가? 바로 그러한 특성을 이 작품 속에선 각각의 캐릭터에게 적용한 듯 보였다. 특정 성향으로 보이던 캐릭터가 어느 순간 다른 환경적 요인에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캐릭터의 특성은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쳐 일반적인 전개에서 벗어나기까지 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 풍성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분명히 캐릭터에 있었다.


사실 이 작품은 선형적인 서사구조를 띄고 있었다. 켄지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이 작품이 그런 구조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단조로울 것이라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중심된 흐름은 1인칭 시점에 따라 주인공 캐릭터를 따라가지만 그것에 개입하는 다양한 플롯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서의 형태를 띈 것도 있으며, 캐릭터를 통해서 발현되는 것도 있으며, 과거의 잔재라는 형태를 띄기도 했다. 그처럼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장식된 이야기들이 곁가지를 이루고 있어서 단조로울 수 있는 구조를 전혀 단조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그러게 이뤄진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그렇게 빠져든 이야기는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로 이뤄진 것이었지만 그들의 갈등은 아시아의 작은 반도국가에 있는 나조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정 공간과 인물들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었다. 관계, 이기심, 욕망, 복수, 사랑, 우정 등과 같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특성들로 이뤄진 이야기이기에 여러 조건을 뛰어넘어 태평양 너머의 나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을 다룬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받기 마련이다. 아! 그 표현의 차이로 천대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긁적.


아동학대와 인종차별, 권력에 대한 불신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 또한 일반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한 기준으로 독자의 감성적, 정서적 흔들림을 유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장르적 특성에 대한 매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흥미를 자극할 만하다. 데뷔작인 이 작품이 '세이머스 상' 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상당 수의 사람들의 이러한 의견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일 듯싶다. 아니면 말고.
그나저나 앤지에 대한 켄지의 사랑은 언젠가 꽃을 피울 때가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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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지와 제나로, 그리고 부바의 모습을 보면서 사에바 료와 카오리 그리고 팔콘을 떠올린 것은 나 뿐인가? 그렇구나. 나 뿐이구나.
+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순서대로, 작가가 발표한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은 첫 작품이니 예외지만 이후의 작품들을 보면 앞서 발표했던 작품의 사건이나 인물들을 종종 언급하곤 한다. 앞선 작품을 보지 못했다면 그런 언급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전쟁 전 한 잔 - 8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